티스토리 뷰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평원군 조승(趙勝)은 조나라 공자로 혜문왕(惠文王)과 효성왕(孝成王)때 재상을 지냈다. 모수자천의 고사로 유명하다. 우경(虞卿)은 같은 시대에 상경을 지내면서 조나라에 충성한 전략가다.


[중국 전국시대 말인 B.C. 300년무렵부터 B.C. 250년 경까지는 진나라가 7웅중 나머지 6국을 압도해 갔던 시기로, 이 시대는 춘추시대의 도시국가에서 전국시대의 영토국가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주제에 의해 씨족제가 해체되면서 귀족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하층귀족인 선비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이들은 대부분 지식인층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저마다 통치기술책을 가지고 패자가 되려는 각국의 군주들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이들을 유세객 또는 식객이라 불리었는데 군주에게 직접 접근이 용이치 않자 왕족이나 재상등 권세가집에 머물면서 군주에게 추천되기를 바라며 정치적 야망을 꿈꾸던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있고 걸출했던 인물이 계명구도로 유명한 제나라의 맹산군, 조나라의 평원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으로 이들을 전국 4공자라 부른다.
이들은 대개 3천명이 넘는 식객을 거느렸다하며 이 식객들로부터 갖가지 술수와 지략, 사건들이 엮어져 나왔다.

평원군은 조나라 공자출신으로 이름은 조승(趙勝)으로 조나라 여러 공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나라 혜문왕과 효성왕의 재상으로 있었는데 세 차레나 재상자리를 떠났다가 세 차례 다시 재상에 올랐다. 평원군은 첩중의 하나가 지나가는 절름발이를 보고 비웃었다하여 첩의 목을 베라는 절름발이의 청원을 들어준 후로 그의 휘하에 수천 명의 선비가 모여들었다.


秦나라에서 조나라 도읍인 한단을 공격해오자 조나라 왕은 평원군을 초나라에 보내어 원군을 청하도록 했다.

이에 평원군은 식객중에 학문도 깊고 용기있는 20명을 선발해 수행케 하기로 하여 그중 19명을 선발하였으나 나머지 한명을 아무리해도 뽑을 수가 없었다.

나의 문하에 식객들이 수천명 있는데 인재들이 이다지도 없단말인가?
평원군이 적이 실망하고 있을 때 식객중에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평원군에게로 나아가 말했다.

추천할 사람이 꼭 한명 있습니다.

그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毛遂自薦이란 고사가 여기에서 나왔다)

모수가 자신을 추천하기에 기가 막힌 평원군은 모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대가 내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3년입니다만…

그러자 평원군은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무릇 현명한 자는 마치 주머니속의 송곳과 같아서 송곳끝이 주머니를 뚫고 바깥으로 비어져 나오듯 금방 세상에 알려지는 법이오.
(夫賢士之處世也, 臂若錐之處囊中, 其末立見)

그런데 그대는 내집에 3년간이나 지냈는데도 주위사람들이 당신을 한번도 칭송하는 소리를 들어보질 못했소.

이는 곧 그대가 능력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니 이번 수행길에 같이 갈 수가 없소.

그러자 모수도 지지않고 대답하였다.

주 인님께서 드신 비유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송곳이긴 하나 지금까지 주머니안에 들어있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일찍부터 주머니 속에 있었더라면 끝을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자루까지 주머니를 뚫고 나왔을 것입니다.

제가 청하는 것은 오늘에야 비로소 저를 주머니속에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臣乃今日請處囊中耳)

평원군은 할 수 없이 나머지 한사람을 모수로 채워넣고 초나라로 떠났다.

처음 선발된 19명이 모수를 경멸했으나 초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초에서 취할 행동들을 의논하는 과정에서 모수의 지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에서 평원군이 합종의 필요성을 설득하였으나 진의 보복이 두려워 머뭇거리는 초의 왕앞으로 모수가 달려가 특이한 방법으로 초왕을 굴복시켜 합종을 성사시켰으며 평원군은 그후로 모수를 상객으로 우대하였다.



 
이 고사에는 유명한 말이 2가지가 나온다.

모수자천 외에 "낭중지추(錐)" 가 바로 그것인데, 뛰어난 사람은 드러내지 않아도 스스로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는 뜻이다.

자신을 스스로 높게 평가한다면, 남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안달하지 말고 묵묵히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면 된다는 거겠지..
 
겸손함의 미덕이라는 것이 미덕 외에도 자신을 위한 또 하나의 책략이 될 수도 있음이다.

진나라로 간 평원군은 모수의 기지로 진왕과 담판하여 조초동맹을 맺는 성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모수를 상객으로 모셨다. 그래서 모수자천(毛遂自薦)이란 고사가 나왔다.

사마천은 평원군을 「혼탁한 세상에서 얻기 드문 훌륭한 공자였으나 나라를 다스리는 큰 이치를 알지는 못하였다」라 평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그릇된 말에 빠져 장평의 군사 40여 만명을 산채로 매장케 하고 한단을 거의 멸망시킬 뻔했던 장편전투를 두고 한 말이다.




곽외도 자천의 대명사이다. '사기'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에 따르면 연나라 소왕(昭王)이 천하의 현자를 구하자 곽외가 "먼저 이 곽외부터 쓰면 저보다 현명한 사람들이 어찌 천리길을 마다하겠습니까?"라고 자천했다. 연 소왕이 곽외를 스승으로 삼자 악의(樂毅)가 위(魏)나라에서 오고 추연(鄒衍)이 제(齊)나라에서 오는 등 많은 현자들이 몰려들었다. 당나라의 시인 한유(韓愈)가 재상(宰相)에게 세 차례나 자천하는 글을 올렸다는 고사처럼 중국에서 자천은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염치를 중시했던 조선은 달랐다. 조선 중기 허봉(許 )이 쓴 '해동야언(海東野言)'은 유자광(柳子光)이 "처음에 갑사(甲士)에 소속되어 건춘문 파직(把直:문지기)이 되었다가 자천하는 상소를 올리니, 세조가 그 사람됨을 장하게 여겨 발탁하여 등용하였다.……그 성품이 음흉하여 사람을 잘 해치고자 하였다"라고 유자광의 자천을 비난하고 있다.

 

인조 때 반정공신 이귀(李貴)가 자신을 이조판서에 자천하자 사헌부 집의 김세렴(金世濂)이 탄핵하다가 현풍(玄風)현감으로 좌천당했는데, 정경세(鄭經世)가 김세렴을 '당대 제일의 인물'이라고 칭찬한 것처럼 조선에서 자천은 금기였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사실상 자천제인 공모제의 폐단을 보완하기 위해 타천(他薦)도 병행한다는 소식이다. 얼마나 훌륭한 인재들이 발탁되는지 지켜보리라.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