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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캐빈 카터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게된건 몇년전의 일이다. 당시에는 사람의 존엄성보다  자신의 명예와 부를 택한 인물 정도로만 그 유명한 사진말 아는 정도였고, 내가 인터넷을 접하다보니 이런 게시물들을 계속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 사이트에서 보게 된 한가지 글때문이다. 내가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진실에 대해서 들려주고자 한다. 이글은  한겨레의 한 카페에서 발췌했다.



                                                                            http://wnetwork.hani.co.kr/sound21c/1341


부제:케빈 카터를 위한 변명



케빈 카터는 1961년에 태어나 1994년에 사망한 사진기자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 아파르트헤이트(분리)정책으로 소요가 극심하던 시절 다른 동료 세명과 함께 Bang Bang Club 으로 불리던 사진가 집단의 일원으로 일했다. 총탄이 난무하고 연일 살해와 방화가 발생하는 전쟁터와 다름없는 현장에서 두려움없이 그리고 가끔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취재현장을 파고든다는 평판으로 남아공화국의 외신 기자들이 붙여준 애칭이 Bang Bang Club이 되었다.

보도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사진기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진기자들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만이 분쟁지역에서 취재를 한다.(종군이란 명칭대신 분쟁지역을 쓴다) 분쟁지역에서 취재하는 사진기자들은 누구나 목숨을 걸고 일을 한다. 보수가 많아서도 아니고 좋은 사진을 건질 확률이 높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인류가 빚어낸 최악의 자기 혐오인 전쟁(혹은 분쟁)을 취재하는 것은 그 비극과 참상을 지구상의 나머지 인류에게 알려 더 이상의 비극을 막으려는 숭고한 의지 때문이다.



케빈 카터는 지역의 작은 언론에서 시작해 후에 로이터, 시그마 포토 등에서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일했다.  보도사진가의 대부분은 늘 가난하게 살고 있고 케빈 카터도 생활고에 시달렸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현장에서 늘 목도하게 되는 참상에 대해 가슴아파했다. 아프리카, 특히 그가 태어난 남아공화국에선 그 당시 분쟁으로 날이 지샜고 총과 칼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피비린내가 가득한 지옥같은 상황을 수도 없이 마주쳐야 했다. 아프리카에서 굶어죽는 아이를 보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구 반대편이나 마찬가지인 한국에서도 아프리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하나가 비쩍 말라 죽어가는 아이들 아닌가.



퓰리쳐상의 피쳐사진 부문에서 상을 받게 된 사진을 찍은 것은 1993년이다. 케빈 카터는 일하고 있던 매체에 휴가를 내고 항공료를 빌려 당시 기아가 극심했던 수단으로 향했다. 아요드란 곳에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기아로 인한 희생자를 찍기 시작했다. 굶어서 죽음에 이르게 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조의 손길이 미치길 갈망하며 넓은 숲으로 이동했다. 그는 한 소녀가 급식센터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사진을 찍으려고 쭈그리고 앉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내려앉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독수리가 날개짓을 하게 되면 더 완성도가 높은 그림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동안 기다렸다. 이윽고 독수리가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독수리는 살아있는 생물체를 공격하지 않는다)셔터를 누르고 독수리를 쫓아냈다. 그 어린 소녀는 다시 급식센터로 향하는 어려운 발걸음을 이었다.

케빈 카터는 나무아래에 주저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하느님~”하고 중얼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의 수단 취재 여행에 동행했던 동료 실바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그후 계속 침통해져있었고 딸을 보고 싶다 면서 계속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사진은 수단의 사진을 찾던 뉴욕타임즈로 보내졌고 1993년 3월 26일자에 실렸다. 그리고 전세계에 사진이 전파되는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 사진이 아프리카의 참상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 것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후 그는 유명해 졌지만 일하던 매체를 그만두고 경제적으론 불안하기 짝이 없는 프리랜서생활을 시작했다. 일을 하고 싶은 욕심때문이었다.

이듬해 4월 12일에 퓰리처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4월 18일 그를 포함한 Bang Bang Club의 동료들은 요하네스버그에서 10마일 떨어진 토코자 마을로 향했다. 폭력사태의 발발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정오가 되기 직전 좋은 사진을 찍기엔 햇빛이 너무 강렬해 카터는 시내로 돌아왔는데 그 순간 라디오에서 동료 켄 오스터브록이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또 다른 동료 마리노비치는 중상이란 소식도 함께.

케빈 카터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다음날 폭력사태가 더 격화되었음에도 다시 토코자에 뛰어 들었다. 훗날 그는 “켄이 아니라 내가 총알을 맞았어야 했다”라고 술회했다.



퓰리쳐상을 받으면서 그는 많은 비난의 목소리도 접해야 했다. 

케빈 카터 자신도 자주 고통스럽게 보도사진가의 딜렘마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시각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피로 붉게 물든 주검을 프레임에 꽉채우기 위해 줌인을 하기도 한다. 죽은자의 얼굴은 약간 회색빛이 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마음내면의 세계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일을 할 시간이며 나머지 일은 (사진을 찍은) 다음에 처리해야 한다고 되뇌이곤 했다. 내가  이 일을 할 자신이 없으면 사진기자란 직업을 관두어야 한다.”

현역 최고의 보도사진가중 한명인 제임스 나치웨이는 카터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자신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사진기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일은 계속하기가 아주 어려운 직업이다”

그해 7월 27일 케빈 카터는 자동차 배기가스에 호스를 연결해 둔채 차안에서 자살했다.

수많은 참상을 지켜본 카터는 남아공에선 흔하기 짝이 없는 마리화나에 자주 피웠고

친구 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말년에는 마약에 기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세상을 뜨면서 악몽과 불길함 따위로 범벅이 된 유서를 남겼다.

“절망적이다. 전화가 끊어졌다...집세도 없고...양육비...빚갚을 돈...돈!!이 없다...나는 살육과 시체들과 분노와 고통에 쫓기고 있다. 굶주리거나 상처를 입은 아이들, 권총을 마구쏘는 미친 사람, 경찰, 살인자, 처형자등의 환상을 본다.” 그리고 이 말도 남겼다.

“내가 운이 좋다면 켄의 곁으로 가고 싶다.”



내가 이글을 쓰고 있는 것은 벌써 10여년전에 세상을 떠나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해진 케빈 카터란 이름을 우연스럽게 지면에서 발견한 때문이다.

2005년 2월 2일치 중앙일보의 ‘생각뉴스’였다. 중앙일보의 기자는 “서울중앙지법이 최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족이 제기한 영화 ‘그때  그사람들’ 상영금지 가처분신청 사건에서 '굶주린 수단 소녀'(1994년)라는 작품(사진)을 찍었던 케빈 카터의 사례를 들며 일부 장면을 삭제토록 했다.”면서 시 형식의 에세이기사를 실었다. 기사에서“사진보다 사람목숨이 우선이었어야 한다는 비난이 고통스러웠던지 예술가는 상처받고 죽어갔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가져야 표현의 자유도 확보된다. 그것을 몰라 불행했던 예술가를 잊지 마라”라며 법관이 영화에 대한 부분 삭제 판결을 했다는 은유를 하고 있다.

여러 가지로 기가 막혔다. 케빈 카터는 생전 듣도보도 못했을 ‘그때 그사람들’이란 영화 때문에 대한민국의 한 기자에 의해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가지지 못한 ‘예술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법원의 판결문 원문을 구해보았다.

“인격권의 주체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스스로 또는 제3자에 대하여 폭넓은 보호를 요구할 지속적 기반을 확보 할 수 있다고 할 것인 점(단적인 예로 케빈 카터라는 작가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독수리가 굶주려 기운을 잃고 엎드려 있는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며 노려보고 있는 보도사진을 촬영하여 1994년 퓨리쳐상을 수상하였으나 1994년 7월 이 사진에 대한 비난과 이로 인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였다고 전해진다)” 여기까지가 관련 판결문의 내용이다.



케빈 카터는 대한민국의 한 판결문에서 역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견지하지 못한 ‘작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과연 위의 기사와 판결문에 등장한 케빈 카터의 사례는 사실(Fact)인가?

케빈 카터는 휴머니즘에 입각해 사명감을 가지고 현장에서 몸을 사리지 않았던 보도사진가였다. 인간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도 더 강했다.

“모든 분쟁지역(다른 표현으론 종군)사진가들은 그들의 동료들이 다른 현장에서 부닥치는 것보다 훨씬 심한 윤리적 걸림돌과 자주 직면한다. 전쟁사진은 다른 보도사진분야보다 본질적으로 비참한 장면을 담게 되어 있다.

게다가 매시간, 매일 열악한 상황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고 스트레스와 공포가 아드레날린과

짬뽕이 되어 어떤 사진을 마감해야하는 지에 대해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의 보도사진가 피터 호위의 말이다.

종군(혹은 분쟁지역전문)사진기자들은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전쟁의 참상을 취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죽음과 마주치는 일이다. 인간의 죽음 앞에서 전쟁과 전쟁으로 촉발된 일련의 참상에 대한 회의를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반전단체에 직접 뛰어들어 집회에 참여하거나 기아돕기 운동을 하는 자원봉사 활동가가 되지는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보도사진기자들의 임무는 따로 있고 그 임무 또한 숭고하고 지난한 것이다.

한국에서 사진기자생활을 하다 현재 미국에서 포토저널리즘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영수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사진기자의 윤리에 관한 한 독자의 질문을 받고 케빈 카터의 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진기자.. Kevin Carter 라는 사진기자의 문제에 대해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제가 가장 관심있게 고민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구요...그의 죽음에 관한 스터디도 하고 그의 사진과 그 상황에 대해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도 하고 했습니다. 현재로서 제가 느끼는 부분은 그 현장에서 그 어린소녀를 구하지 않은데 대한 스스로의 자책감이 그럴 죽음으로 몰아 넣은게 아니라 그 사진이 주는 의미와 그가 겪어야 했던 인간으로서의 슬픔을 이해하기보다는  단지 명성이나 돈을 위해 그 상황을 이용한 추악한 인간으로 내몬 무책임한 비평가들과 세상에 대한 분노이고 좌절이라고 믿습니다.

그때 그가 사진을 찍지 않고 그냥 그 소녀를 구하기만 했다면  그 현장에서 그렇게 굶어 죽어가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의 그 비참한 현실을 그냥 안락한 집에 앉아서 자신들의 편안함만을 추구 하는 많은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했을것이며. 그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을 이끌어 내지도 못했을 겝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쓰는 이유는 보도사진가의 자살에 대한 논란이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진행이 되어왔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도 ‘인간의 목숨이 먼저’일 뿐 다른 그 어떤 말도 변명이다 라고 반론을 제기하실 것 같아서 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마음이 쓰인 것은 한없이 마음이 여리면서도 지난한 보도사진기자의 길을 추구했던 케빈 카터의 불우한 생애가 매도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통해 케빈 카터에 대한 글을 찾아보았다. 최소한 한국에서 글을 쓰면서 케빈 카터의 사례를 인용하는 사람은 대부분이 그의 사진을 간단하게 매도하고 있었다. 보도사진의 윤리를 언급하는 사람은 전문가든 아마추어든 모두 케빈의 사진과 인생의 종말을 인용하며 “케빈은 그 사진을 찍고 괴로워하다 자살했다”,“세상의 비난을 피할 길이 없어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사진은 휴머니즘의 표출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가 괴로워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인간관계등 개인사(친한 친구의 사망, 가정불화, 심약한 퍼스낼러티로 인한 대마초 흡연)에 기인한 것이다. 그 소녀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굶주리고 병든 자들을 위한 고민도 당연히 했다. 그러나 그 소녀를 잘 먹이지 못한 죄책감이 아니라 비극의 원인인 전쟁의 참혹함 때문에 괴로워 한 것이다. 

보도사진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분쟁지역(종군)의 사진기자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한 인간의 존엄성을 그렇게 간단한 필설로 훼손시켜도 되는 것일까?

그는 사진을 통해 부나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려고 했던 사람도 아니었고 작가나 예술가는 더욱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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