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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지의 비극` 겪은 숭례문…정부는 대리인 역할에 소홀

◆박유연 기자의 알기쉬운 경제이론◆

숭례문 방화 사건이 발생한 지 어느덧 한 달이 더 지났다. 사태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개방하지 않았더라면…'이란 가정을 해본다. 이 같은 생각은 단지 비현실적인 단상에 불과할까. 이 속에도 경제학적 배경이 들어 있다.

한 초원이 있다. 원래 주인이 있던 초원이었지만 갑자기 이 주인이 주변 농민들에게 공동 소유권을 넘긴 채 마을을 떠났다. 그러자 평소 접근도 못 했던 주변 농민들이 너도나도 이 초원에 소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소에게 풀을 뜯기기만 할 뿐 아무도 초원을 관리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원은 수많은 소들로 인해 황무지가 돼 버렸다.

경제학에서 너무도 유명한 '공유지의 비극' 이론이다.

특정 주인이 없는 공공재는 발길이 잦을수록 제 기능을 상실하거나 아예 사라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이론이다. 상황은 다르지만 숭례문도 여기에 빗대어 볼 수 있다. 숭례문은 국민 전체가 공동 주인이라는 전제가 있을 뿐 사적인 주인이 없다.

만일 누군가에게 숭례문에 대한 소유권이 있었다면 이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아무도 관리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숭례문은 한 사람의 손에 의해 허망하게 타버렸다.

하지만 공유지라 해도 관리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공유지를 오가는 공동 주인들이 관리인을 세우면 된다. 숭례문에서 관리인 구실은 정부가 대신한다. 관리인이 제 구실을 하면 무수한 사람들 발길이 이어진다 해도 숭례문은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여기서 또 다른 경제학 이론인 '주인-대리인' 문제를 적용할 수 있다. 숭례문은 복잡한 주인-대리인의 연쇄 관계가 있다. 국보 1호의 근본 주인은 국민이다. 국민은 그 관리인(대리인)으로 정부를 두고 있으며, 정부는 다시 문화재청 지자체 등 하위기관을 대리인으로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대리인의 연쇄관계는 서울 중구청 하급 직원, 나아가 경비회사로까지 이어진다.

대리인이 주인의 뜻을 충분히 받들어 공유지를 철저히 관리하면 공유지는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대리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리인 처지에서는 주어진 일에 주력하느니 그 안에서 사적인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최선이기 때문이다. 이에 문화재청은 남대문을 소홀히 관리했고, 중구청의 한 직원은 여러 회사에 숭례문 경비 용역을 돌려 맡기며 개인적인 이득을 챙기기도 했다. 결국 숭례문은 시민들에게 개방되면서 공유지가 됐고, 대리인으로 내세운 정부가 관리를 소홀히 하면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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