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카를 빼고 러시아를 말할 수는 없다. 러시아 남자들과 진정으로 친구가 되고자 원한다면 그들이 주는 보드카 잔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러시아 사람들은 일본인보다 한국을 더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일본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술을 권하지 않는다. 건배를 권유 받아도 자기 주량에 맞게 먹고 만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의 술 습관은,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째째한 일본 방식이 아니라 술을 권하고 쓰러질 때까지 마시는 러시아 스타일이다. 한국 사람들과 찐하게 술 자리를 같이한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그날 이후로 친한파로 돌아선다고 한다. 아마 음주습관과 문화의 비슷함이 인종적, 지리적, 역사적 장벽을 넘어서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한국인과 같이 술을 먹고 2차, 3차까지 가는것을 아니지만, 술을 먹고 쓰러질 때까지 마신다. 그래서 심한 경우에는 술을 먹고 쓰러진 사람 머리 위에 술을 부어주는 풍습도 있다.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도 우리나라의 음주 문화와 비슷하다. "당신이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한 잔 더 들자"하는 식으로 권한다.
러시아인에게 보드카란 수 많은 술 중의 하나가 아니라 러시아의 역사와 기후, 그리고 민중의 애환이 서린 러시아 그 자체이다. 앙드레 지드는 러시아의 소설에서 술마시는 장면을 빼버리면, "관절 빠진 손과 손목과 손가락 같다"고 비유하였다. 러시아의 춥고 어두운 日氣와 專制와 공산주의의 음산하고 우울한 체제는 보드카라는 독한 술과 분위기가 어쩐지 어울린다는 느낌을 준다. 가벼운 코메디풍의 연극에서는 가벼운 맥주가, 인간의 복잡하고 고통에 찬 비극에서는 독한 양주가 적절하게 어울리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따라서 비러시아인으로 처음 러시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보드카 마시기를 사실 주저한다. 보드카 이름이야 많이 들었지만 실제 한국에서 러시아 보드카를 마시는 것은 불가능하다. 잘해 보아야 영국제 스미르노프는 볼 수 있지만 칵테일 베이스로 사용되지 그것을 가지고 보드카 본래의 맛을 즐기는 사람은 한국에서는 거의 없다. 사람의 미각만큼 간사하고 편견에 가득찬 것은 없다. 게다가 러시아 보드카 특유의 투박하고 조잡한 디스플레이는 이 술에 대한 어떤 의심마저 불러 일으킨다. 러시아에 살면서도 거의 러시아 사람과 접촉을 하지 않고 사는 한국인들은 몇 년이 지나도 보드카는 고기에 간 맞추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는 술로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인치고 보드카를 애찬하거나 잘 마시는 사람은 두 분류 중의 하나이다.
보드카 맛보기
보드카의 맛은 강력한 알코올에 있다. 보드카는 거의 순수한 주정으로서 무색, 무미, 무취를 특색으로 한다. 따라서 보드카의 알콜은 혀 끝에서 향기가 도는 꼬냑이나 부드럽게 목을 넘어가는 위스키와 달리 술이 위장에 도달해서야 알코올이 온 몸을 휘감기 시작한다. 소주도 어느 정도 그러한 작용을 하지만 화학주 특유의 쓴 맛 때문에 "캭"하는 신음을 낸다. 그러나 보드카는 감자, 밀, 보리 등을 원료로 발효하여 양조되고, 연속식 증류기에 의해 알코올 농도 85%의 주정으로 증류된 다음, 한대림에 많은 자작나무로 구운 숯으로 여과하는 과정에서 술에 녹아 있는 일체의 향미성분이 제거된다. 따라서 보드카는 알코올 그 자체이다.
소주를 즐겨마시는 사람은 당연히 보드카를 좋아한다. 나의 친구 아버님은 은퇴한 교장 선생님인 데, 이 분은 대단한 술 실력을 가지고 계신다. 결국 의사가 더 이상 술을 마시는 것을 금지시킨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아버님이 친구가 러시아에서 가지고 온 보드카 맛을 보시고는, 그 이후로 이 친구의 고민은 어떻게 보드카를 러시아에서 많이 가지고 올 것인가 되었다.
보드카를 좋아하는 또 한 부류는 러시아를 정말 좋아하고 많은 러시아 친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의 대학 동창 중의 한 사람은 대학 4년 내내 거의 술을 마시지 않고 지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성격도 내성적인데다 체질적으로 술을 받지 않았다. 덕분에 술 취한 우리 친구들 뒤치닥거리한다고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 친구가 카자흐에 간지 2년만에 서울로 돌아 왔는 데, 그 날 만남에서 친구들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우리들보다 소주를 더 잘마시는 것이 아닌가. 이 친구 말에 의하면, 도저히 위스키나 꼬냑은 아직도 들어 가지 않지만 보드카는 자기 체질에 꼭 맞다나. 나는 보드카가 이 친구의 체질에 맞는 것이 아니라 이 친구가 러시아에 동화되면서 보드카에 체질을 맞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물론 이 친구는 많은 러시아 친구들을 가지고 있으며 러시아에 대한 애정도 누구보다 높다.
보드카에 중독되기
러시아의 한국 학생들 사이에는 우스개 소리로 택시에서 배운 러시아어는 '택시 노어', 시장에서 물건 값을 흥정하면서 배운 러시아어를 '리녹 노어', 러시아 여자하고 사귀면서 배운 러시아어는 '베드 노어'라고 하고 술마시면서 배운 러시아어는 '보드카 노어'라고 한다. 보드카 러시아어를 배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러시아어가 잘 안나오는데 술만 마셨다 하면, 신기하게도 러시아가 쉽게 나오고 상대방의 이야기도 분명하게 듣는다.
처음에는 같은 한국인 친구들이나 러시아 사람들하고 의례적으로 보드카를 한 잔씩 먹다가 보드카에 맛을 들인 첫 번째 징후는 한국의 소주가 입에 맞지 않는다는 신호가 올 때이다. 특히 러시아에 있다가 한국에 가서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된다. 만약 여러분이 보드카를 먹다가 한국 소주를 먹고는 "어쩐지 술이 싱겁고 쓰다"라는 신호를 몸에서 받게 되면, 러시아 보드카 맛을 아는 입문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보드카의 입문에서 중급으로 넘어 가기 위해서는 보드카를 마실 때, 곡주 특유의 고소한 냄새를 느껴야 한다. 정확하게 재워 보지는 않았지만 같은 양을 가지고 소주와 보드카를 비교한다면 보드카가 휠씬 무겁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알콜 농도를 볼 때, 보드카가 40도로서 소주보다 비중이 높다. 그러나 보드카를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곡주가 여과되는 과정에서 그 결정체가 보드카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리와 감자의 단백한 고소함을 보드카에서 느낀다면, 이제 보드카 맛을 본격적으로 아는 주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보드카 술꾼은 보드카를 위스키나 꼬냑처럼 마시는 사람이다. 위스키나 꼬냑은 안주없이 마실 수 있는 술이다. 그러나 보드카는 육질의 고기 안주가 가장 어울리는 술이다. 보드카 자체가 순수 알콜이기 때문에 고기 맛을 더욱 진하게 느낄수 있다. 물론 좋은 요리를 먹을 때 포도주만큼 좋은 술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삼겹살에 소주 한 잔"를 선호하듯이 보드카를 맛들이게 되면 당연히 소주 대신 보드카를 찾게 된다. 그런데 이 단계를 지나 보드카가 식후에 간단하게 한 잔 하거나 추위가 몰아 닥칠 때 몸을 덥히게 위하여 한 잔 한다면 이는 당연히 보드카의 최고 경지에 오른 것이다.
식후에 한 잔 하는 것은 위스키이고, 몸을 녹이기 위하여 마시는 술은 브랜드 종류로서 꼬냑이다. 많은 러시아 작가의 소설에서 겨울의 추위를 몰아내기 위해 보드카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 경지에 이르면 보드카는 그에게 만병통치약이다. 러시아 주당들은 감기에 걸리면 후추와 함께 보드카를 마신다. 배가 아플 때도 보드카에 소금을 타서 마신다.
결국 최고의 단계는 어느 정도 알콜 중독에 접어든 것이다. 보드카의 사회병리학적 문제점으로 알콜 중독은 러시아에서 심각하다. 하기야 옐친 전대통령부터 알콜중독자이니 일반 민초들의 알콜 중독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보드카에 얽힌 옐친의 기행은 해외 토픽기사에서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크레믈린 관찰자들의 주요한 관측 기준이 되고 있다. 보드카 음주광인 옐친은 에이레를 방문 중에 기내에서 과음하여 정상회담을 연기한 적도 있으며, 한 겨울에 보드카를 먹다가 마음에 안든 보좌관을 모스크바 강에 빠뜨리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 물론 명령에 충실한 경호원들이 이 보좌관을 한 겨울의 모스크바 강에 당연히 집어 넣었다. 옐친 이외에도 보드카는 러시아 정치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91년 8월 쿠데타로 대통령 대행을 했던 야나예프 부통령은 쿠데타 성공을 방송에 발표하면서 전날 불안 때문에 퍼마신 보드카로 긴장감을 노출하였기 때문에 쿠테타가 실패할 것이라는 조짐을 대중들에게 노출하였다. 심하게 말하자면, 러시아는 술 때문에 쿠데타가 실패한 유일한 나라이다.
점점 문제가 되고 있는 러시아의 주당들
러시아인들의 보드카 중독은 통계적으로도 분명히 나타난다. 러시아 남자들은 연평균 0.5ℓ짜리 보드카 1백70병을 마시고 있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남자들의 평균수명은 지난 87년 64.9세에서 93년에는 59세로 떨어졌으며, 인구 10만명당 알코올에 의한 사망자는 86년 9·3명에서 90년 10·8명으로, 이어 94년에는 37·8명으로 무려 3·5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물론 평균수명이 줄어든 것은 단순한 알콜중독 때문이 아니라 체제전환기의 혼란과 스트레스도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치를 보다 이해하기 쉽게 360ℓ의 25도 진로 소주 한 병으로 환산한다면, 거의 하루에 한 병식 러시아 남자들은 소주를 마신 셈이다. 따라서 보드카 때문에 근로 생산성이 떨어지고 가정이 파탄에 빠지게 되었다는 고르바쵸프의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짜 주당들을 빼고, 술의 향과 맛, 그리고 빛깔을 음미하는 예술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드카는 그렇게 매력적인 술은 아니다. 특히 러시아의 젊은 여자들은 남자들만큼이나 보드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여자들이 좋아하는 칵테일의 가장 널리 사용되는 베이스가 보드카이다. 토니워터나 체리, 레몬, 오렌지 등의 과실들을 보드카와 칵테일하면 바로 그 과일의 향미와 술기운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칵테일 베이스의 보드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레몬 보드카(레몬스카야 보드카)를 추천하고 싶다.
보드카가 이렇게도 인기를 얻는데도 불구하고, 보드카는 싸구려 믿을 수 없는 술이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하여 모두가 잘 아는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다시 생각해 보자. 휘트니 휴스턴과 캐빈 코스트너가 나오는 '보디가드'에서 휘트니 휴스턴이 딸의 행방을 걱정하여 저녁 늦게 혼자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 사용된 술이 러시아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보드카, '스탈리치나야'이다. 세계 최고의 몸 값비싸고 코대높은 휘트니 휴스턴도 마시는 술이 보드카라는 것 - 물론 영화 상의 이야기이겠지만 -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이렇게 보드카를 애찬함에도 불구하고, 또한 소비양도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모스크바에서도 보드카는 점점 더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 최근 로쉬코프 모스크바 시장은 학교와 병원 주변에서 보드카의 판매를 금지하였다. 또한 관세가 붙지 않거나 엉성한 국경으로 인하여 몰래 넘어 들어온 외국의 각종 술들이 보드카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러시아 본토 맥주는 이미 파산 선고를 받았고, 러시아 주변 국가들이 싼 값에 마구 생산하는 보드카로 인하여 러시아제 보드카는 근본적으로 존립의 기반을 위협받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유입된 싸구려 보드카는 러시아 국민들의 연간 보드카 전체 소비량인 25억 리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보드카의 현재의 위기는 러시아가 스스로 자처하였다. 러시아 보드카 생산업체의 가장 큰 문제는 품질관리에 있다. 주류생산업체가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1세기 이상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이름난 주류업체는 거의 가족기업이다. 나는 러시아의 민영화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보드카 업체는 반드시 민영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00년을 한결같이 똑같은 품질의 술 맛을 내기 위해서는 관료적이고 책임을 질려고 하지않는 국영기업으로서는 불가능하고 장인정신을 가진 가족기업과 이들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러시아 보드카의 그 유명한 성가에도 불구하고 왜 세계적인 보드카 메이커는 비러시아계가 차지하였는가? 바로 이러한 품질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은 보드카 구별하는 방법
보드카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시장에서 보드카를 살 때 걱정하는 것이 "이게 진짜 보드카 맞아"라는 의문을 항상 제기한다. 물론 시중에서 가짜 보드카도 많이 나돌기도 하지만 보드카 생산업체도 능력이 안되면서 무리하게 생산을 하다 보니까 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시장에 내보내다가 문제를 일으킨 적이 많다. 명예를 존중하는 가족기업이라면 일시적 수요를 위해 단기적 투매에 절대 응하지 않는다. 러시아에서 보드카의 브랜드의 신용이 실추하자 이것을 순간적으로 모면하기 위하여 계속 다른 보드카 상표를 만들어내는 악순환이 지금 러시아에 벌어지고 있다. 보드카 브랜드로 현직 대통령의 이름도 이용된다. 독일에서 생산되는 보드카 '고르바초프', '옐친'도 있고 러시아제 AK-47 소총 발명가로 유명한 칼라시니코프를 상표로 한 보드카도 있다. 이제는 너무나 다양한 다른 이름의 보드카가 나와서 주당들도 헷갈릴 지경이다. 결국 새로운 보드카 이름짓기는 보드카 전반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
보드카는 12-13세기부터 러시아에서 생산되었다. 포드르 대제 시대부터 짜르 정부는 국가 재정의 확보를 위하여 보드카의 국가독점체제를 유지하였다. 공산당체제에서도 당연히 보드카는 국가에 의해 독점되는 사업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가족기업에 의해 유지되는 세계적인 위스키나 꼬냑과 달리 세계적인 보드카 생산업체가 러시아에서 나오지 못하였다. 92년 러시아 정부가 자유화정책을 실시하면서 민간에서도 보드카 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수많은 보드카 생산업체가 난립하면서, 저질 보드카를 먹고 사망한 사건도 간혹 발생하였으며 싼 가격으로 인하여 알코올중독이 확산되는 조짐마저 나타났다. 보드카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하여 보드카의 종주국인 러시아에서 스미르노프 브랜드를 수입하여 생산하는 지경이니 보드카에 대한 일반의 불신이 얼마나 높은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나 보드카 맛을 아는 사람들은 스미로프나 압살류트같은 비러시아계 보드카가 절대 진짜 러시아 보드카 맛을 흉내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 보드카를 먹고 싶은 분들을 위하여 진짜 보드카와 가짜 보드카, 잘 만든 보드카와 품질이 떨어지는 보드카를 구별하는 방법을 제시하겠다. 하지만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설사 집에서 밀조된 보드카를 사서 먹더라도 한국에서 밀조된 막걸리가 큰 문제가 없듯이, 밀조 보드카도 나름의 품질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도 안심을 하지 못하는 분들을 다음과 같은 사항을 체크하기 바란다. 먼저 여러분이 사고자 하는 보드카 병을 들고 흔들어 보기 바란다. 보드카는 40도의 알콜이기 때문에 병을 흔들게 되면 병 안에서 거품이 위로 치솟게 된다. 만약 거품이 일어나지 않거나 병 밑에 침전물이 있으면 다른 보드카를 구하는 것이 좋다. 둘째, 보드카의 국적과 회사를 잘 살펴보기 바란다. '모스코프스키 자보드 크리스탈', 즉 모스크바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보드카 메이커인 크리스탈 회사에서 만드는 보드카가 우크라이나제나 벨로루스제보다 품질 면에서 확실히 낫다. 이 회사는 다양한 보드카를 만드는 데, 그 중에서 전통의 스탈리치나야를 구입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셋째, 그래도 러시아 보드카의 조잡한 디스플레이 때문에 의심이 가는 사람은 보드카를 구입할 때, 가능한 신뢰가 가는 상점에서 구입하는 수밖에 없다. 키오스크에서나 길거리에서 손에 들고 파는 보드카는 가급적 피하고, 슈퍼의 일종인 가스트로놈이나 술가게 '비노 마가진', 그리고 가장 확실한 것은 공항의 면세점에서 보드카를 구입한다면 문제는 없다.
보드카 잘 마시는 방법
이제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보드카를 구입하였다면 보드카를 가장 잘 마시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보드카를 냉동실에 보관하여 보드카를 차게 만들어야 한다. 보드카는 기온이 영하 20。C이하로 떨어진 상태에서도 얼지 않는 알콜의 원액이다. 보드카를 차게 만들어야 되는 이유는 알콜 특유의 냄새를 되도록 죽이기 위해서이다. 보드카가 무색, 무미, 무취라고 하지만 좋은 보드카일수록 보드카에서 알콜 냄새가 나지 않는다. 알콜의 냄새를 가급적 죽이는 것이 보드카 제조의 가장 핵심적인 기술이다. 상온 상태의 보드카는 아무래도 알콜의 냄새가 남아 있다. 그러나 보드카를 위스키처럼 얼음에 섞어 마시는 것은 별 좋은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보드카는 소주처럼 입에 탁 털어 넣는 술이지 맛과 향기를 음미하는 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드카의 느낌은 혀 끝에서가 아니라 위장에서 터지는 화끔함에 있다. 따라서 보드카의 안주는 고기가 최고이다. 시장의 한 구석이나 공원의 한 모퉁이에서 '샤실리크'라는 양고기 꼬치 구이를 러시아에서는 많이 파는 데, 러시아의 주당들과 여기서 간단하게 한 잔 먹는 보드카가 죽이는 맛이다. 또한 '쵸르나야 이크라'라고 불리우는 철갑상어 알을 러시아의 흰 빵에다 버터와 함께 발라서 먹는 보드카는 러시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보드카 먹는 방법이다. 국물이 있는 안주는 소주와는 어울리지만 보드카의 안주로는 부적격하다. 한국 사람들 중에 밤 늦게 호텔에서 라면 국물을 안주 삼아 보드카를 먹다가 속이 쓰린 경험을 한 사람이 많다. 보드카는 40도의 알콜 원액이기 때문에 그게 배 속에서 짠 국물과 섞이게 되면 위에 부담이 간다. 차라리 보드카가 독하다고 느끼면 물을 겉들여 마시거나 맥주를 입가심으로 마시는게 좋다. 보드카의 좋은 점은 역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도 거뜬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고량주 계통과 비교하여, 보드카의 또 다른 좋은 점은 계속 마셔도 술이 질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오타이주 등의 고량주는 중국의 기름기 많은 음식을 좋은 향과 독한 술 기운으로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시 향기나는 술은 다음 날에 다시 마시면 질리게 된다. 그러나 보드카는 무취를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향료의 술 꼬냑보다 화끈한 위스키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 입 맛에 더 맞다. 과음한 보드카로 숙취 때문에 고생은 해보았지만 술 냄새도 맛기 싫다는 일반적인 표현은 보드카에 대해서만 적절하지 못하다.
보드카 문화의 가장 좋은 점은 보드카 자체가 혼자서 마시는 술이 아니라 여러 명이 같이 어울려서 먹는 '나눔과 친교'의 술이라는 점이다. 한 밤 중에 고독을 씹으면서 먹는 술은 아무래도 위스키나 꼬냑이 보드카보다 나을 것이다. 좋은 안주에 떠들썩한 친구들과 어울려 보드카 잔을 드는 것이 가장 보드카를 잘 먹는 방법이다. 러시아가 서구의 개인주의에 물들지 않고 아직 집단과 공동체를 중시하는 가치가 러시아인들의 이러한 술 관습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러시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직장 상사나 보스가 보드카를 잘 마시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보드카를 통한 강한 집단적 일체감을 느낀다.
보드카 중독자였던 옐친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었던 이유도 러시아의 이러한 음주문화에 있다. 아마 여러분이 러시아의 전통적인 국영기업의 사장들과 술을 마시는 기회가 있다면,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엄청나게 센 술 실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흐루시초프 회고록'에 보면 스탈린도 대단한 음주가였다 한다. 러시아 정치의 특징은 중요한 정책 논의와 결정이 저녁의 보스의 술자리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술자리에 초대된 간부 가운데 술을 이겨내지 못하거나 그 자리에 불려가지 못하는 자는 권력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숙청의 예비 인물로 전전긍긍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처럼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러시아인들은 상대방이 조금만 잔을 비워도 금새 잔을 채우고 계속 건배를 한다. 건배의 내용은 술 자리의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나온다.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자 즈다로비예"(건강을 위하여), "자 드루지부"(우정을 위하여), "도 드나"(잔을 비우자) 등이 있다. 러시아 사람들은 물론 간단하게 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건배를 통해 자기가 마음 속에 하고 싶은 애기를 마음껏하는 경향이 있다. 여러분들도 러시아 사람과 이런 술 자리가 있으면 사전에 하고 싶은 말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한 가지 한국 사람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첫 잔의 건배를 제외하고는 꼭 한국처럼 다 마실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술을 못드시는 분들도 분위기를 위해서 첫 잔은 다 비우는 것이 러시아인들을 기쁘게 한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물론 술에 강한 일부 한국 분들은 러시아식의 사교적인 건배가 아니라 한국식의 끝을 보는 건배로 이끌어 가는 바람에 러시아에 친한파를 형성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러시아를 이성적으로만 느끼지 말라고 충고한다. 우리식의 기준으로 바라보아선 절대 러시아를 이해하지 못한다. 러시아라는 나라는 역사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이 나라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전혀 상이한 체계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 스스로 실험한 유일한 나라이다. 이 나라는 혁명이라는 지순한 이념을 위해 수 백만명의 사람들이 죽어간 나라이다. 반대로 인간의 절제되지 못한 욕망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을만큼 관대한 나라이기도 하다. 나는 이 비밀의 실마리가 어느 정도 보드카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보드카는 차가운 술이다. 그러나 그것이 안으로 들어가면 뜨거운 술이다. 러시아인들이 보드카를 먹지 않을 때는 차가운 자본주의 서구형의 인간이었다가 그것이 안으로 들어가면 뜨거은 열정을 지닌 순수한 공산주의형의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러시아를 느끼고 싶으면 보드카는 반드시 먹거나 적어도 그 문화는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보드카 이외에 러시아에서 맛 볼 수 있는 술
이왕 러시아 술 이야기가 나왔으니 러시아에서 맛볼 수 있는 보드카 이외의 다른 술을 추천하겠다. 지금도 구소련의 각 지역에서 만든 그 지방 특유의 명주가 여전히 러시아로 유입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추천할 만한 것은 아르메니아의 꼬냑과 몰다비아의 백포도주, 그루지야의 붉은 포도주이다.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아는 풍부한 일조량과 카프카즈 산맥의 맑은 물을 이용하여 세계적인 명주를 만들고 있다.
포도주만큼 세계 어디에서나 그 나라 고유의 상표를 찾을 수 있고 별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술은 없을 것이다. 구소련의 많은 지역에서 다양한 포도주가 생산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그루지야(영어로는 조지아)의 붉은 포도주와 몰다비아의 백포도주이다. 몰다비아는 일조량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단점은 있지만 드네프르의 푸른 강을 젖 줄 삼아 생산되는 청포도에서 나오는 백포도주는 상큼한 입 맛을 준다. 나는 포도주 중에서 흐반츠까라(KHVANCHKARA)라고 불리우는 그루지야 남부에서 생산되는 붉은 포도주를 가장 좋아한다. 물론 돈만 많다면 프랑스의 고급 포도주를 좋아하겠지만 나의 경제적 능력 때문에 아직 진짜 비싼 포도주를 먹어본 적이 없다. 포도주만큼 다양한 맛을 내고 각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술도 드물다. 나는 포도주의 쌀쌀한 맛과 신 맛, 그리고 단 맛보다는 숙성된 그윽한 맛을 좋아한다. 이런 점에서 그윽한 맛의 그루지야 붉은 포도주는, 용산 업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가격 대비 성능'의 측면에서 다른 분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다.
아르메니아는 구약에서부터 나오는 유명한 포도주의 고향이다. 예레반의 포도주는 지금도 유명하지만 '아라라트'(Ararat) 상표로 대표되는 꼬냑은 세계에서 프랑스 꼬냑과 유일하게 경쟁할 수 있는 제품이다. 아라라트는 구약성서의 노아가 지상의 대홍수를 피해 정착한 기독교인의 성지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산은 아르메니아에 속하지 않고 터키령에 들어간다. 백두산에 마음대로 갈 수 없기 때문에 백두산을 더욱 신성시하는 우리 민족과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라라트를 항상 자신들의 모태로 간주한다.
아라라트 꼬냑의 품질을 보장한 사람은 워스턴 처칠이다. 처칠은 1945년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 얄타회담에 참석하여 아르메니아 꼬냑을 맛보고 그 이후 매년마다 많은 꼬냑을 영국으로 수입해 갔다고 한다. 아마 영국의 라이벌인 프랑스에 대한 견제 심리가 처칠로 하여금 아르메니아 꼬냑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꼬냑의 품질은 향기에 있다. 위스키나 보드카는 많은 유사 제품을 쉽게 모방할 수 있지만 꼬냑의 향기는 쉽게 흉내내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양조과정이 있다. 프랑스 꼬냑과 비교하여 아르메니아 꼬냑도 뛰어난 향기와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다. 러시아에 오게 되면 프랑스 꼬냑의 절반에도 못비치는 가격에 이 꼬냑을 반드시 맛보기 바란다. 단 주의할 것은 모스크바에서 만든 아라라트 꼬냑도 있고 조지아산 꼬냑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아라라트 산이 보이는 아르메니아 꼬냑을 구해야 한다. 또한 아라라트 꼬냑도 다양한 종류가 있는 데, '보즈라스트 레트'로 나오는, 적어도 숙성 기간이 7년 이상이 되는 것을 찾아야 한다. 당연히 숙성 연도가 높을수록 고급의 비싼 꼬냑이다.